중고책에 얽힌 부끄러운 모험

같은 건물에 사는 한 남자가 이사를 간다며 수많은 책들을 건물 입구에 진열해 놓았다. 혹시나 들여다 보았더니 흥미로운 책들이 꽤 있었다. 게다가 그 범주도 꽤 넓었는데, 영화, 연극, 역사 소설, 러시아 문학, 명상, 기타 실용서, 비디오 테잎들까지... 얼씨구나 싶어 고르고 골라 열 권 좀 덜되게 집에 가져다 놓고 뿌듯해 했었는데.

저주는 얼마 후에 일어났다.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광고를 봤는데, St Michel가에 있는 B 모 서점 광고였다. 중고책, 씨디 등을 사고 판다는 곳. 그리고 말았으면 좋았는데, 갑자기 건물 입구의 그 수많은 책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 뿐이었으면 좋았을 걸, 옆집 사는 우리 집주인이 또 여행을 떠났고 게다가 집 열쇠까지 맡겨놓고 갔다는 것. 그리고 전에 그 집에서 쇼핑용 카트를 발견했던 것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순식같에 급류에 휩쓸린 듯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어찌 저항할 수도 없었다.

옆집 P 씨의 쇼핑 카트를 빌려, 헌 책들을 한껏 골라 담아 신나게 '그곳'을 향해 떠났다. 가게를 들어서서 점원에게 자랑스레 내가 온 목적을 말하고 카운터 위에 책을 쌓아 올렸다. 그가 순식간에 책을 세보더니 말한 금액은 놀랍게도 2유로 30상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그냥 무기력하게, 계산이 어떤 식으로 되느냐 물었는데 대충 권당 5상팀 - 약 60원 정도 - 정도 된다던가 하는 대답을 대충 흘려 들었을 뿐... 어이없었지만 그냥 그에게 다 넘겨버리고 말았다. 나 자신의 탐욕을 벌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괜히 나 멋지자고 하는 소리 같고, 사실은 거의 기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러마고 대답했던 것 같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많은 후회를 했다. 이웃들에게 부끄럽기도 했고. 평생 섣불리 헌책을 팔아보겠다는 생각 같은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파리 8대학의 주요 상영목록(?)

스무 살, 도쿄 - 오쿠다 히데오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