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08의 게시물 표시

A가 사라졌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올 봄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처음으로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전 어느날. 짧지 않은 어학과정을 마치고, 그 중간 파리로 이사도 하고, 결국 입학한 대학의 첫 수업이 시작하기 몇분 전. 직관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강의실 번호매김 때문에 짧지 않은 시간 방황한 끝에 간신히 다다른 강의실 앞이었다. 벌써 강의실 문앞에 여럿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객관적 주관적 정황으로 볼 때 강의가 있어선 안되겠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건 그곳에 줄지어 있던 모두가 잘못된 강의실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또 한바탕 대이동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A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딱히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쨌건 일본인일 거라고 예상을 했었는데, 실은 대만인 이었다. 무엇인지 잊어버렸지만, 대만의 대학에서 영화가 아닌 무언가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름을 물었을 때, 본명이 아닌 A로 시작하는 좀 감상적인 필명같은 것을 대신 알려줬고,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는 한자로 무언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별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뭔가를 읽거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늘 작고 또박또박 그러나 느릿한 말투로 - 적어도 프랑스어로 말할 때에는 -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보면 낯선 사람에게 말붙이기를 수월하게 하지 못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은 내게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며 왜 피우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담배피우는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저 중독일 뿐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 대답이 충분했었는지 아니면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 그의 표정이나 대꾸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괜히 그 모습을 떠올려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조금 더 설명을 해 줄껄 그랬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얘기가 무척이나 길어졌을 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피우는가, 몇 시에 피우는가, 그 전에 ...

연례행사

프랑스 정부는 우리에게 해마다 최소한 한번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체류증 갱신이라는 명목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이 중대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서류철을 뒤지고 복사를 하고 그걸 또 정리하는 귀찮은 일을 해댔는데, 그 도중에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던 이름이 생각났다. 카프카. 많은 사람들이 ‘변신’이라는 짧은 작품을 쉽사릴 떠올릴텐데, 나로선 먼저 장편 ‘성’이 떠오른다. 이상적인 케이스 – 접수, 서류제출, 발급을 제때에 문제없이 해내는 것 – 로 갱신을 마친다 하더라도 수없이 무의미, 무기력, 우울 따위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한데, 게다가 한단계에서 조그마한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그는 바로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한 외국인 – 합법적으로 합당한 목표를 위해 체류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 의 입장에서 볼 때 절차의 번거로움과 담당자들의 까다로움은 소설의 주인공 – K였던가 아니면 진짜 이름이었던가 ? – 이 겪는 것과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악한 음모가 있건 없건 간에 당연해 보이는 어떤 목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거부하고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이기적인 성향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이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상처입히게 될 것이고, 고로 이제 그가 다른 곳으로 떠냐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쨌건, 올해는 – 역시나 크고작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 다소 편안하게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서류를 접수하는 여자가 돌연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 제출했던 사진과 이번 제출한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그때 컴퓨터를 뒤져, 스스로 촬영한 후보작들 – 겨우 딸랑 둘, 그것도 한날 한시에 찍은 – 중에서 하나를 골라 여럿 출력해 두고 적당히 돌려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그 크기에 그런 일률적인 표정과 포즈로 찍은 내 모습이란 것이 지난 수년간부터 향후 수...

핸드폰 사건

지난주 일요일 정오경, nation 역에서 montreuil쪽으로 가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이든 한 여자 노숙자가 번개같이 내 핸드폰을 뺏어들고는 열차 트랙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뭐라고 막 욕을 해대기 시작하는데… 너무 황당해 왜 그랬느냐고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는 무수한 단어들을 지껄여댈 뿐이다. 잠시 후, 가방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꺼내서는 내 얼굴을 찍으려 했는데, 한손으로 이를 방해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더라. 조금 시간이 더 지나고 그 여자는 열차를 타고 떠나버리고, 황당한 나와 주변의 몇명의 행인들이 남겨졌다. 그 중 친절한 한 커플의 도움을 좀 받아 역무원을 부르고 상황을 설명하고 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역무원이 가져온 쓰레기 줍개로는 길이가 모자라 15분 여를 더 기다려 또 한 역무원과 함께 선로의 전기를 차단하고 그가 직접 선로에 내려가 3개의 조각으로 분리된 핸드폰을 건넸다. 다행히 조립하고 전원을 넣어보니 제대로 작동하기에 한숨을 돌렸고. 미친(듯 보이는) 여자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할텐데 아마 내가 뭔가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세계 각지에서 온갖 종류의 테러, 총기사고 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한 공격의 위험이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폭력을 가하는 자가 (뒤늦게라도) 이해가능한 패턴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때로 이해불가능한 동기에 의해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경험하고 보니 더욱 섬뜩한 느낌이 든다. 핸드폰이 아니라 누군가가 열차가 들어오는 선로에 던져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까지 생각이 미치니 말이다. 오만가지 이유로 사소한 혹은 치명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지는 순간, 이에 저항할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하고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소위 ‘보통’ 사람들은 차차로 더 지옥이 가까와지고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들 ...

개강

늘 그래왔기 때문에 다시 말을 꺼내기도 새삼스럽지만, 여름방학은 일견 길어 보이지만, 무척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막판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 때문에 허둥거리게 된다. 인생이란게 그런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에 아직 좀 나이가 적지 않은가 싶긴 하지만 다행히도 망각이라는 작용 때문에 미처 끝내지 못한 수없이 많은 중요한 일들을 그냥 어물쩡 지나칠 수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3달이 넘는 여름방학이라는 기간은 그러기에는 퍽이나 짧은 기간이다. 메모를 해놓지 않는다 해도 어떻게 소논문과 인턴 과정의 이수가 학위 수여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남들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건, 다행히 그 기간동안 누나의 결혼식도 있었고 그때문에 가족들도 멀리 이국땅까지 날아왔고, 그 사이에도 아이는 매일 세끼를 먹이고 가능하면 낮잠도 재워야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에 있어 내 역할이 지극히 미약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적당히 무임승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래, 한 가족의 범위 내에서 볼 때 충분히 파란만장한 여름을 나 역시 함께 살아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찌어찌하여 계속해서 논문제출과 인턴 이수의 대드라인을 한 15번 정도 나의 재량으로 연기를 거듭한 끝에 한국에서 뜨끈하고 습습한 여름을 맞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약간 미안했지만 완전히 고개를 숙이지는 않고 나름 당당하게 시립 도서관에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매일같이 책상을 마주했는데, 하고자 하는 것은 막히고 대신 열심히 책을 읽어댔다. 사라마구의 책을 한권 더 읽었고, 에코의 최신작과 에세이집도 보고, 컴퓨터가 번역한 것 같은 영화 기술에 대한 책도 보고, 뜬금없이 김소진의 소설집도 보고, 황석영도 보고, 신예 작가들의 소설집도 보고… 역시 세상일은 이상한 곳에서 묘하게 통하는 법인지,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열심히 읽어대고 있다. Modiano의 가장 최근 소설을 읽었고, Alain-Fournier의 Le G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