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7일 일요일

Le stade nautique Maurice Thorez

거의 일년 반만에 동네 수영장에 다녀왔다.

집사람이 마저 샤워를 하는 동안 아이와 함께 이제 문닫을 준비를 하는 수영장 구경을 했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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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내조의 여왕

이제 9회 감상을 약 몇시간 남긴 시각, 8회까지 보며 느꼈던 몇가지.

일부 멜로드라마적 설정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천지애가 양봉순에게 '그래도 친구인데' 하면서 별 생각없이 한 한마디를 던지는데, 어김없이 배신당하고는 '그래도 친구인데' - 거의 같은 문장을 억양만 살짝 바꿔주면 잘도 딱딱 맞아떨어진다 - 하며 눈물을 흘리고, 한발 더 나아가면 무릎을 꿇고 '내가 더 잘할께'를 반복하게 만드는 상황. 왜 이런 상황이 툭하면 불편하게 느껴지는걸까 나 자신에게 한참을 묻고 또 묻고 했는데 딱히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거창하게, 원래 코미디와 멜로가 함께 가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 아닌가 생각도 했었고, '난 원래 드라마같은거 안좋아하는데' 말하다가 억지로 떼밀려 본다는 듯한 인상을 집사람에게 은근슬쩍 표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어찌어찌 잠재의식화 해서 비판의식이 쓸데없이 강해진 듯도 하고. 그러나 어쨌든, 그냥 웃으면서 재미있는데 왜 그런 답답한 상황을 굳이 몇번씩이나 보여줘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두 여자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과거가 언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끈적끈적 불편함 감정들을 다른 방식으로 - 기왕이면 너무 힘들어가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그럼 환타지 드라마가 되려나?

김남주가 연기한 천지애는 회가 갈수록 점점 흥미가 떨어진다. 몇몇 제스처와 재미있는 억양과 몇몇 대사의 효과가 이제 떨어질 때가 됐지 싶다.

이 드라마 전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오지호의 온달수는 참 외모가 잘났구나, 웃는 모습이 귀엽구나 하는 생각을 초기에 끊임없이 들게 했는데 이 역시도 슬슬 익숙해 졌고. 출중한 외모와 지능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순박한 모습에 이런 사람 찾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있으면 호감이 가긴 하겠다 하는 마음 여전하긴 하다. 이제 차차 실력 - 아마도 지능? - 도 발휘해 가겠구나 싶어 조금 기대가 될 듯도 하고 글쎄 싶기도 하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건 은소현, 허태준 사장 부부를 연기한 선우선과 윤상현도 마찬가지. 선우선의 경우 연기도 그렇고 인물도 그렇고 딱히 불만은 없지만 - 역 비중을 감안한 상대적인 기준에서 - 어쩐지 너무 정해진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윤상현의 경우는 극의 중반을 지나가면서 배우나 인물 모두에 조금씩 호감이 더해가긴 하는데, 그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게 사랑이야' 하는 노래 가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갑자기 웃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선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김이사 부부의 김창완과 나영희 부부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이유로 둘 모두에게 부정적인 생각이다. 김창완의 경우, 그의 출중한 연기력과 비범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그의 음모와 관련하여 뭔가 더 나오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평범한 악역으로 그쳐서는 안될텐데 하는 심정이다. 나영희의 경우에는 배우보다는 연기하는 인물에 불만이 많다. 그런데 그 인물이라는게 어찌보면 아주 평범한 이사 사모님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이르게 되면, 역시 현실이란 (왠만한) 픽션보다 불편한 것이고 그래서 사실주의는 거북하기 그지없다는 등의 초점없는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의외로 드라마의 열쇠가 되는 것은 양봉순과 한준혁의 이혜영과 최철호 - 송구하게도 이 배우 역시 내겐 전혀 낯선 얼굴이다 -. 솔직히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 이상 결국은 뜬소리일 수 밖에 없겠지만, 양봉순은 천지애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 외에 별다른 긍정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나 계모가 신데렐라 구박하듯 천지애를 막대하는 식 말이다. 그런 불균형을 잡아주는 장치로 과거에 천지애의 부적절한 태도의 부각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결국 드라마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약간 농담을 섞어, 앞으로의 행보가 가장 궁금한 인물은 한준혁. 어쩐지 다른 인물들의 셋팅이 다 끝나고 슬슬 그 궤도안에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지루함속에서 갑자기 그가 보여준 변화들은 정말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그가 집들이 후 회사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보여준 모습에서, 이 드라마를 조금 더 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으니까.

2009년 2월 26일 목요일

검은 땅의 소녀와 - 2007

La petite fille de la terre noire

강원도의 어느 탄광촌. 영림과 나이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는 그녀의 오빠 동구, 그리고 광부인 아버지 해곤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진폐증 판정을 받지만 합병증이 없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직장을 잃는다. 게다가 그들의 집까지 철거 대상으로 지정된다. 생계를 위해 생선 행상에 나서지만 사고로 이까지 무산되고 술에 빠져 더이상 가족을 돌보지 못하게 되는 아버지. 결국 영림은 오빠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이 모든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림의 하는 양을 바라보자니 어울리는 듯 그렇지 않은 듯한 어떤 즐거움이 느껴진다. 티비를 보다가 노래와 춤을 따라하고, 애꿎은 닭을 빗자루로 두들기고, 겨우 라면 세개와 소주 한병을 훔쳐 도망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의 바지를 갈아입히는 아홉살 소녀. 철거 통지문을 더듬더듬 읽어갈 때, 그녀가 그 낯설은 단어들을 이해하기 힘들듯 왜 때로는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덜 걱정스러운 상황인 것인지, 입원과 새 아파트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따위를 영화 말미즈음엔 그녀가 결국 이해하게 되었을까 아닐까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지하 탄광속 마치 다큐멘터리같은 카메라의 시선.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되 결국 당사자에겐 끔찍한 선고가 되고 마는 이야기들을, 영화속 상담자나 의사가 아니라 마치 관객이 선고자인 것처럼 카메라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이를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인 화면속 인물. 아름다운 것도 아니지만 추한 것도 아닌 그저 그 자리에 놓여있는 듯한 어느 탄광촌의 풍경들. 갱도속처럼 검은 빛으로 둘러쌓여 있으나 마치 외부 세계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오누이가 함께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공간. 이 땅에 속한, 이 땅의 것으로 그린 것이라 말하는 듯한 눈위의 꽃과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

소리내어 울지 않는 멜로, 굳이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는 사회 드라마, 결국 어디로도 도피하지 않는 환타지. 이렇게 어느 ‘경계’에 서 있는 영화.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뻘쭘한 순간

사람좋아보이지만 실은 무척 고통스럽게 강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Robin 선생님. 인연이 좀 있었는지 학부때 한번, 그리고 이번 학기에 또 수업을 들었다. 신기하게도 두번 모두 꽤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강의 마지막 시간에 일일이 한명씩 면담을 하며 시험 답안지를 나눠주는 까닭에 그 기다림이 꽤 지루하면서도 스릴있긴 하지만, 그 꼼꼼함 내지는 친절함이 되려 불편했을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점 만점에 어쩔 수 없이 준 것 같은 1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들고 그와 마주앉아서 '주로' 문제점들에 대해서 한 10분간 떠들어댄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불상사는 없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일종'의 칭찬을 듣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명색이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내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상대방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에 수긍한다는 듯 아무말않고 있는 것은 사실 그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지극히 당연한 말에는 그에 걸맞게 아주 강한 어조로 동의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말을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표현으로 한번 더 반복해 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며 처음의 말을 다시 반복해주는 센스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조금 더 여력이 된다면 대화의 내용과 별 상관이 없더라도 저명한 인사의 말을 인용해 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그의 생각에 티끌만큼도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고.

문제는 이미 그 효과가 증명된 대화 패턴을 무시하고 마치 혁신적인 논문을 쓰듯 상대방의 주제에서 슬그머니 한발을 내디딜때 발생한다. 물론 이것도 "네 그렇습니다" "뭘 그런 말씀을 다" "부족한점이 많은데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따위의 관용적인 표현들을 반복하기가 지겹기도 하거니와 - 게다가 조금 긴 관용표현들을 내가 외우고 있을 턱이 없잖은가 - 슬쩍 우쭐한 나머지 자신의 샤프함을 조금 더 드러내보자고 만용을 부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만큼 핵심도 없고 듣기도 괴로운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의 표정을 잘 살필 용기가 없었는데, 아마 그도 순간 놀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학부에서의 강의 마지막 수업에서 벌어졌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아니하니, 어떻게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단한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그나마 나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글로만 만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일일 꺼라는 생각이 든다.

2008년 10월 25일 토요일

A가 사라졌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올 봄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처음으로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년전 어느날. 짧지 않은 어학과정을 마치고, 그 중간 파리로 이사도 하고, 결국 입학한 대학의 첫 수업이 시작하기 몇분 전. 직관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강의실 번호매김 때문에 짧지 않은 시간 방황한 끝에 간신히 다다른 강의실 앞이었다. 벌써 강의실 문앞에 여럿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객관적 주관적 정황으로 볼 때 강의가 있어선 안되겠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건 그곳에 줄지어 있던 모두가 잘못된 강의실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또 한바탕 대이동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A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딱히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쨌건 일본인일 거라고 예상을 했었는데, 실은 대만인 이었다. 무엇인지 잊어버렸지만, 대만의 대학에서 영화가 아닌 무언가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이름을 물었을 때, 본명이 아닌 A로 시작하는 좀 감상적인 필명같은 것을 대신 알려줬고,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는 한자로 무언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별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뭔가를 읽거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늘 작고 또박또박 그러나 느릿한 말투로 - 적어도 프랑스어로 말할 때에는 -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보면 낯선 사람에게 말붙이기를 수월하게 하지 못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은 내게 담배를 피우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며 왜 피우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담배피우는 남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저 중독일 뿐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 대답이 충분했었는지 아니면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 그의 표정이나 대꾸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괜히 그 모습을 떠올려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조금 더 설명을 해 줄껄 그랬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얘기가 무척이나 길어졌을 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피우는가, 몇 시에 피우는가, 그 전에 무엇을 먹거나 마셨는가, 어떤 기분인가,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몸은 피곤한가, 주변에 행인은 있는가 없는가, 담배갑에 몇 개피의 담배가 남아 있는가, 혼자인가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인가... 외국어로 이런 것들을 묘사해야 할 필요가 생길 때, 간단 명료해지고 시니컬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진지하고 키가 작고 대머리에 도무지 국적을 가늠하기 힘든 교수의 수업시간이었는데, 워낙에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던 그는 강의 쉬는 시간중 사라진 몇 명의 학생들을 적발한다며 출석을 다시 부르고는 그 다음 강의때 하나하나씩 호명하며 수업 주제에 대한 작문을 해 올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A는 자취를 감추었다. 적어도 나와, 알고 지내는 몇 명의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꽤 시간이 지나고 그 중 한 대만 친구가 그녀에 대한 인상을 말했줬는데 bizarre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좀 강한 단어라 여겨진다. 이해하기 힘들다거나, 좀 다르다 아니면 좀 특별한 친구였다 정도였다면 더 듣기가 편했을 텐데.

엄밀히 말해 정확히 언제부터 학교를 떠난 것인지, 무슨 이유였던 것인지, 아직 이 나라에 남아있긴 한건지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이유는 조금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상상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 내가 상상한 한 이야기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돌연 어이없는 사건에 의해 결말지어지는 이야기. 그냥 어쩐지 쓸쓸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연례행사

프랑스 정부는 우리에게 해마다 최소한 한번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숙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체류증 갱신이라는 명목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이 중대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서류철을 뒤지고 복사를 하고 그걸 또 정리하는 귀찮은 일을 해댔는데, 그 도중에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던 이름이 생각났다. 카프카. 많은 사람들이 ‘변신’이라는 짧은 작품을 쉽사릴 떠올릴텐데, 나로선 먼저 장편 ‘성’이 떠오른다. 이상적인 케이스 – 접수, 서류제출, 발급을 제때에 문제없이 해내는 것 – 로 갱신을 마친다 하더라도 수없이 무의미, 무기력, 우울 따위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한데, 게다가 한단계에서 조그마한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그는 바로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한 외국인 – 합법적으로 합당한 목표를 위해 체류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 의 입장에서 볼 때 절차의 번거로움과 담당자들의 까다로움은 소설의 주인공 – K였던가 아니면 진짜 이름이었던가 ? – 이 겪는 것과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악한 음모가 있건 없건 간에 당연해 보이는 어떤 목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사실을 거부하고 한 개인 혹은 집단의 이기적인 성향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이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상처입히게 될 것이고, 고로 이제 그가 다른 곳으로 떠냐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쨌건, 올해는 – 역시나 크고작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 다소 편안하게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서류를 접수하는 여자가 돌연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해 제출했던 사진과 이번 제출한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그때 컴퓨터를 뒤져, 스스로 촬영한 후보작들 – 겨우 딸랑 둘, 그것도 한날 한시에 찍은 – 중에서 하나를 골라 여럿 출력해 두고 적당히 돌려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그 크기에 그런 일률적인 표정과 포즈로 찍은 내 모습이란 것이 지난 수년간부터 향후 수년간은 별반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래왔던 것이 내 공식적인 이유였으므로 차분히 이의를 제기했다. 대충, malgré que je refais les photos, ça risque d’être identique éventuellement,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니 photo d’identité가 해마다 identique할 수 있는가 없는가, 혹은 반드시 그렇지 않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거의 철학의 수준에 이른다.

그러고보면, 해마다 똑같은 양식의 서류들을 똑같은 내용으로 채우고, 간혹 같은 내용에 지난해 일어났던 일 – 1학년에서 2학년으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 따위 – 한줄을 더해간다는 사실도 역시 숙고의 여지가 있다. 가령 운나쁜 한 사내가 10년동안 열심히 공부만 하고 산다면, 그 첫해의 일은 약 9번, 둘째 해의 일은 8번, 결국 역삼각형 모양의 자기독백을 10년간에 걸쳐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지루한 반복을 인간적 행정적 공학 측면에서 검토해 본다면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보르헤스의 단편집을 다시 펼쳐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