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 오쿠다 히데오

79년의 어느 날, 다무라 히사오는 재수를 위해 고향 나고야에서 도쿄로 상경한다. 이듬해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하고 연극 서클에 가입하여 활동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퇴한다. 이어 작은 광고 회사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성공하여 자신의 회사를 갖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까지 계속된다. 그는 어쩐지 낯익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벽함과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분명한 취향과 자긍심, 그리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 근성. 음악을 사랑하는 인물에 걸맞게 이야기의 곳곳에서 몇몇 뮤지션과 그들의 노래가 소재로 등장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인물이 겪는 배고픔과 연속되는 헤매임의 모티브가 인상적이다. 마치 청춘이라는 상태에 대한 은유라는 듯이. 10년에 걸친 기간 중,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특정 일자에는 다소 느슨한 이정표적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야구 선수의 프로 무대 데뷔일, 존 레논의 죽음, 어느 음악 그룹의 마지막 콘서트, 올림픽 개최지 선정일과 같은. 히사오와 그를 둘러싼 청춘의 삶에 적잖이 의미있는 사건인 듯 한가 싶으면, 그저 무심히 스쳐가는 행인처럼 별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야기 속, 아주 대단하다 싶은 사건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히사오가 조금씩 성장하는 듯한 모습이 반가웠다. 사방 팔방으로 헤매는 그의 여정 속, 바로 다음 순간의 그의 자리가 어디일까 미리 예상할 수 없어 즐거웠다. 예상보다 - <남쪽으로 튀어>의 영향으로 - 조금 덜 웃으며 읽기를 마쳤지만, 그래서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상 20210105

깜박 잠이 들었다가 12시를 조금 넘겨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이 막 떠올랐다. 퇴근길, 이어폰 끼고 운전하는 중에 H군의 전화를 받았다. 지난 번에 했던 얘기들을 많이 반복했다. 그가 느끼는 절박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옆자리에서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고모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맞장구 쳐대며 웃음을 떠뜨렸다. 문득 영어 문법책 속 한 문장이 떠올랐다. 대충 ‘어린 여자아이들은 웃음 터지는 걸 참기가 힘들다’는 뜻의 문장이었다. 두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저자가 무심히 집어넣었을 이 문장은 현재까지 형성된 내 고정관념에 얼마만큼 기여를 했을까?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 중에 이 문장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페북에서 N군 일상의 한 단면을 엿보았다. 그리고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아주 간간이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고 땅에는 마치 다 비운 설탕통 바닥 마냥 흰 가루가 조금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일상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어서, 시도때도 없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묻던 국어 수업이 실은 굉장히 훌륭한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의미 있는 질문이었는데, 객관식 문제의 정답으로 모두를 이끌겠다는 선하지만 어리석은 의지 때문에 – 이럴땐 SF 소설 속 이상주의자들이 건설한 미래 사회가 늘 삐걱대는 모습을 상상한다 - ‘틀렸다’를 남발하는 교사에 대한 분노의 영향으로 진정한 배움의 경지에 닿기는 영 힘들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삐딱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겨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이 스물에 한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던 더 뼛속까지 ‘선한’ 사람들을 통해 – 그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 삐딱을 넘어 모든 것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던 것 같다. 핑계일지도… 그리고 뜬금없게도,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많은 빚을 졌으며 갚아야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일찍이 K군이 자신의 논문 앞자락에 집...

독수리 에디 - Eddie the Eagle (2015)

어린 시절부터 올림픽 출전을 꿈꾸던 에디.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영국 유일의 국가대표 스키 점프 선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독일로 향한다. 그는 전 미국 국가대표에서 퇴출된 브론슨을 우연히 만나고, 88년 캘거리에서 올림픽 출전의 꿈을 실현한다. 에디의 대책없는 열정이 끊임없이 웃음 짓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당시는 낙관적 기운이 지금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많은 점에서 더 느슨한 세상이었을 거라고. 어떻게 경험 일천한 그가 각국의 국가 대표 선수들 틈에서 점프 연습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유쾌한 전율에 사로잡힌다. 이제 어머니의 절대적인 믿음, 마치 영화 속 같은 코치와의 만남, 다른 영화 속 같았다면 뻔하게 극적인 설정이다 싶은 요소들을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세계는 별로 세련되진 않았지만 누구나 간절히 원하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낙관적 분위기 때문에 경계심을 낮춘 탓이다. 어쩌면 지난 세기의 뮤지컬 영화들을 보며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재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론슨이 에디에게 여배우를 상상하며 점프하라 가르치는 씬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큰 웃음 포인트였다. 에디가 올림픽에서 관중을 열광시키는 장면에선, 뜬금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의 마음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막바지에 브론슨이 그의 코치였던 워렌 샤프와 만날 때 쯤엔 드라마의 마법에서 살짝 깨어나는 중이었는데, 배우 크리스토퍼 워큰이 아니었다면 조금 뜨악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얼굴을 볼 때면, '디어 헌터'를 떠올릴 때면 늘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 

왕좌의 게임 - Game of Thrones (2011 ~ 2019)

부담때문에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 많이 화제가 되길래 크게 맘 먹고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일년만에 완주에 성공했다... 초반엔 별 생각없이 폭력과 에로티시즘 덕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고, 여러 세력들의 역학 관계가 흥미를 지속시키고, 볼턴 같은 변태적 인물이 강한 자극을 주는가 하면, 베일리시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궁금해하기도 하며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수많은 인물들이 다채로운 모험을 벌이는 통에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근의 경향에 비추어 지나치게 마초적으로 여성 신체 노출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 놀라울 지경이었다. 시리즈가 시작한 9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많이 변한 걸까? 대너리스의 캐릭터가 마초성 문제를 얼마간 상쇄한다 싶었는데, 그녀의 마지막을 보고 좀 맥이 빠졌다. 남성 제작자 - 작가, 감독 등을 싸잡아서 - 가 여성 캐릭터를 필요에 의해 소모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티리온 라니스터라는 캐릭터는 여러 면에서 오래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시리즈의 막바지에는 사실 좀 지치기도 하여 드라마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는데, 뜬금없게도 제이미와 서세이가 마치 인류 중 둘만 살아남았다는 듯이 열을 올리는 모습에 가슴이 좀 뭉클했다. 

테넷 - Tenet (2020)

우크라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일어난 테러 현장에서 임무 수행 그리고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서 자살약을 먹은 주인공.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깨어나고, 그를 시험하기 위한 테스트였다는 설명과 세계를 구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단지 설명은 손가락을 깍지 끼는 제스처와 '테넷 TENET'이라는 단어뿐. 단서를 따라가던 주인공은 사토르 SATOR 라는 인물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가 미래에서 전해온 인버전 Inversion 기술을 이용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닐 Neil 이라는 요원과 팀을 이루고, 사토르의 아내인 캣 Kat 에게 접근한다... 인버전이란 아이디어가 퍽 신선했는데, 단지 시간 여행을 넘어 시간의 역행과 순행이라는 독특한 묘사를 가능케 하는 탓이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순행자와 역행자 간의 상호 작용이 영화 속에서처럼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 시간의 한 순간이 아닌 연속적인 일정 시간 동안 두 주체 간의 격투 또는 추격과 같은 행위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야기의 복잡함에 비해 인물들의 심리는 상당히 소홀하게 다뤄지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에 대해 큰 불만은 없다. 다만 그럼으로써 주인공은 말 그대로 그냥 '주인공'이 되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영화는, 과거의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마저 가능해졌으나 정작 이를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함 앞에서, 인간에게 남은 몫은 무엇일까 고민하기를 청하는 우화가 된다. 이야기 자체로 가슴 서늘한 우화라면, 주인공의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나서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아닌지 따위는 굳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주 좋은 우화라고 선뜻 결론 내리지는 못하겠다. 복잡한 플롯과 수많은 정보를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하기에 급급한 탓인지 -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 비어있는 듯해도 그 빈자리를 상상력으로 채...

델타 보이즈 (2016)

매형의 공장에 일하는 일록에게, 어느 날 미국에 살던 친구 예건이 찾아온다. 남성 사중창 경연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대용과 그의 후배 준세와 함께 델타 보이즈라는 중창단을 결성하여 연습한다.  이 한심한 청년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앞뒤 재지 않고 꿈을 좇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냉정히 생각하면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정이 들어서인지 바보같이 티격대는 모습을 보아도 밉지 않다. 전혀 무해할 것 없는 - 이에 대해 지혜의 생각은 좀 다를 것이나 - 그들에게 몇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게 된다.  그래서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예건과 일록이 라면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가 이 영화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 해본다. 그것도 이야기의 전개와 크게 상관없는 부분들. 유년기부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게도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 시끄럽게 이를 쑤시는 행동. 이에 대한 친구의 '개병신'이라는 받아침. 어색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멈추지 않는데, 어쩐지 영화도 나도 함께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가 하면, 이 남자들은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무척 궁금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가슴 졸여야 했다. 그들이 과연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네 사내가 성공적인 중창 공연 무대를 완성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아닌, 말 그대로 - 들어줄 만하게 -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예건에게 정말로 중창단을 리드할 능력이 있을까 영화 후반까지 끊임없이 궁금했다. 그것이 해결되고 나자 곧바로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한 염려로 이어졌고. 궁금증을 해결하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감정이 더욱 각별한 듯하다. 궁금증, 기대...

남매의 여름밤 (2019)

여름 방학, 옥주는 아빠와 남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집에 머문다. 남편과의 불화를 겪는 고모까지 합세하여 다섯 식구가 함께 여름을 보낸다.  여름밤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설렘의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어디서든   얼마   동안이든   헤매다녀도   끄떡없을   포근한   날씨,   후덥지근함   속에   가끔씩   바람에   실려오던   서늘함,   마음에   담아둔   누군가를   생각하며   막막하기도   설레기도   했던   기억들,   집을   떠나   시골에서   바닷가에서   느꼈던   낯선   마음... 할아버지의 오래된 집에 들어오는 순간의 옥주가 품었을 마음은 어땠을까? 예상과 달리 그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무뚝뚝한 할아버지 곁에서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나중에야 생각이 미쳤다. 아직 몸도 마음도 다 자라지 않은 이 아이의 마음 속엔 대체 어떤 폭풍이 지나고 있었을까 하고. 좋아하는 남자 아이와의 관계, 엄마의 부재, 갑작스런 이사, 할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의 - 이해하기 힘든 - 생각... 뒤늦게...